
*광야;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영혼의 밤
*미친 코끼리; 시간의 덧없음(無常)
*옛우물; 이 삶의 현장
*등나무 줄기; 생명줄
*검은 쥐와 흰 쥐; 밤과 낮
*네 마리 독사; 이 현상과 육체의 기본 구성 요소인
四大(흙, 물, 불, 바람)
*다섯 방울의 꿀; 오욕락五慾樂
( 財; 재물을 모으는 재미, 色; 관능적 쾌락, 食; 식도락 , 名; 명예욕, 睡: 무사안일한 생활)
*벌들; 잘못된 견해(邪見)
*들불; 늙음과 병고
*우물바닥의 괴물; 죽음
‘안수정등(岸樹井藤)’에서, ‘안수(岸樹)’는 강기슭의 나무 즉, 절벽의 나무를 의미한다.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있는 큰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쉬운 경우이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 라고 비유한데서 연유하여 이를 하유(河喩)라고 한다. ‘정등(井藤)’은 ‘우물속의 등나무 넝쿨‘ 이란 뜻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절벽에서 등나무 넝쿨을 잡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잠깐동안 절체절명의 위기와 황홀한 꿀맛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인간사를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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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비유경」은 8세기 당나라 시대의 학승인 의정(義淨)이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 경전으로, 원래는 ☞팔리어 경전이었다. 이 경전은 붓다께서 전한 비유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일반인들이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경전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이서사실(二鼠四蛇)’이라는 비유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광야에서 놀던 한 사람이 사나운 코끼리에 쫓겨 등나무 뿌리를 잡고 우물에 숨었다. 그러나 그가 잡은 등나무 뿌리는 흰 쥐와 검은 쥐에 의해 갉아 먹히고 있었고, 그 아래에 네 마리의 뱀이 그를 물려고 하고 있었다. 또한, 뱀 아래에는 독룡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나무 위에는 벌집이 있어 꿀이 다섯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사나이는 미혹한 중생, 광야는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 코끼리는 무상한 시간, 우물은 생사의 현장, 넝쿨 줄기는 수명, 독룡은 죽음, 네 마리 독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사대(지수화풍),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들불은 늙음과 병듦, 다섯 방울의 꿀물은 오욕락을 의미한다.
‘흰 쥐와 검은 쥐의 비유’는 우리가 무상하고 고통에 포위된 한계상황 속에서 있으면서도 어리석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 오욕락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는 한심한 인생임을 일깨워 주는 비유다.
‘이서사실(二鼠四蛇) ‘의 비유는 인간이 처한 현실의 위험성과 덧없음을 강조하며, 삶의 무상함과 고통을 깨닫게 하기 위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이를 통해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명(無明), 무상(無常), 생로병사(生老病死) 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이 비유는 불교적 가르침을 일상적인 상황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써, 일반인들이 불교 교리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 ‘흰 쥐와 검은 쥐의 비유’를 들어서 인생의 무상과 깨우침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톨스토이는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허망하게 낭비할 수는 없음을 투철하게 반성하고, 어제의 그릇된 삶에서 ☞전미개오(轉迷開悟)한 참회와 성장의 새로운 삶을 그의 소설 속에서 제시하였다.

독일 철학자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1844∼1900)
비유경의 ‘안수정등(岸樹井藤)’과 ‘이서사실(二鼠四蛇)’ 비유는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쾌락에 대한 망각적 집착을 경고한다. 특히 흰 쥐와 검은 쥐가 등나무 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상황은, 우리가 시간(낮과 밤)에 의해 소멸해가는 유한한 존재임에도 당장의 쾌락(꿀물)에 도취되어 절망의 밑바닥(독룡)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보여준다. 만약 니체가 이 비유를 접했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니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니체는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를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철학으로 돌파한다. 불교 비유에 나오는 인물은 ‘미혹한 중생’으로 묘사되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자각 없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니체는 이와 같은 상태를 ‘노예 도덕’, 즉 외부 권위나 종교적 신념에 기대어 삶을 정당화하려는 약자의 윤리로 본다.
등나무에 매달려 꿀을 핥는 인간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삶의 공포를 외면하고, 의식의 잠 속에 빠져 감각적 쾌락을 통해 자기를 위로한다. 니체라면 말할 것이다. “그대는 그 꿀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절벽 아래의 독룡을 직면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도리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닌 의지, 즉 고통과 무상성을 직시한 후에도 그 삶을 긍정하고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힘이다.
또한, 니체는 죽음의 불가피함 앞에서 쾌락에 탐닉하는 태도보다, 오히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超人)의 태도를 강조한다. 초인은 꿀물의 향기에 취하지 않는다. 그는 삶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통까지도 창조의 연료로 삼는다.
결국 <비유경>의 비유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 유한성, 그리고 덧없음에 대한 묘사이며, 니체는 그것을 도피의 이유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삶을 긍정하는 계기로 삼으라고 말한다. 니체적 관점에서 이 비유는 삶의 허망함을 넘어서, 운명에 대한 사랑과 의지의 승화로 나아갈 수 있는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